이주엽 (2020). 《몽골제국의 후예들: 티무르제국부터 러시아까지, 몽골제국 이후의 중앙유라시아사》. 책과함께.
책의 저자 이주엽 선생님은 한국어로 된 저술 활동을 거의 하지 않기에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영미권 중앙유라시아 학계에서 높이 평가받는 학자이시다. 전에 소개한 Qazaqlïq, or Ambitious Brigandage, and the Formation of the Qazaqs: State and Identity in Post-Mongol Central Eurasia가 브릴 출판사를 통해 발간된 점, 이슬람학 연구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Encyclopedia of Islam, THREE의 필진으로 참여한 점 정도만 꼽아보아도 이주엽이라는 학자의 학문적 성과가 국제 학계에서 얼마나 인정받는지는 잘 알 수 있다. 이분이 적은 논문을 교재로 활용하는 대학교도 적지 않다고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Oxford Reseach Encyclopedias, Asian History에 기고한 “Turkic Identity in Mongol and Post-Mongol Central Asia and the Qipchaq Steppe”(2019)의 경우 중국어로 번역되어 활용될 정도이다. 언젠가 이분의 연구를 한국어로 꼭 소개해야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당신께서 직접 책을 냈다고 하니 정말 반가웠다.
책은 몽골계승성을 뼈대로 몽골제국이 해체되는 14세기 중반부터 17세기경 유라시아 전반에 걸쳐 존재한 몽골계승국가와 유라시아제국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본문은 총 4부로 이루어지고 각각 몽골제국의 4대 울루스라 할 수 있는 차가타이 울루스, 훌레구 울루스(일칸국), 조치 울루스, 카안 울루스(원나라) 영역에 따라 나누어진다. 1부는 차가타이 울루스의 영역에서 피어난 티무르조와 모굴칸국을 다룬다. 2부는 일칸국의 후계국이라 할 수 있는 오스만제국, 잘라이르조에 대한 내용이다. 3부는 책에서 비중이 가장 큰 부분인데, 조치 울루스에서 파생되거나 영향을 크게 받은 모스크바국가, 크름칸국(크림칸국), 카자흐칸국, 우즈벡계 칸국들에 대해 각기 다루고 있다. 4부는 중국 상실 이후의 카안울루스(북원)과 그 후계국가인 대청을 위한 단락이다.
나는 몽골계승국가들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깊었기 때문에 서장과 결론을 읽은 뒤 순서대로 주욱 읽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서장과 결론만 읽고 나머지는 백과사전식으로 활용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서장은 몽골제국의 해체부터 18세기 초까지 몽골계승국가와 유라시아 제국들의 역사를 몽골제국의 유산을 중심으로 일목요연하게 서술했기 때문에 책의 전반적인 틀을 잡기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한다. 그러나 나머지 장들은 각기 한 국가만을 다루고, 각 꼭지들에 대해서도 목차가 잘 구성된 편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필요한 부분을 찾아서 보면 된다. 각 장의 구조도 일관된 형식에 얽메이기 보다는 각 국가의 특징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쓰여졌다. 예를 들어, 1부 1장 “티무르제국”의 경우 몽골과 튀르크의 구분에 대한 현재의 통념을 철저히 당대의 기록에 근거하여 비판한 뒤, 그에 따라 티무르제국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서술하고 있다. 3부 6장 “모스크바대공국”의 경우 첫째 단락과 둘째 단락에서 몽골의 러시아 지역 침공에 대한 복합적인 상을 서술하며 부정 일변도를 달리는 통념을 비판하면서 시작한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이후의 내용은 주제별로 모스크바국가의 기원부터 몽골 제도의 도입 등 순서로 작성되었다.
이 책의 장점은 근대 초기 유라시아 육상제국들에 존재했던 몽골 계승성에 대해 최신 연구 성과에 기반하여 명확히 서술한 점이다. 테무르에 대한 서술이 좋은 예이다. 보통 테무르를 비롯한 포스트 몽골 시대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어 사용 유목집단은 ‘투르크·몽골(Turko-Mongol)’이라 서술된다. 이는 당대 사료에서 사용된 아트라키 무굴(Atrak-i Mughul) 또는 투르카니 무굴(Turkan-i Mughul)의 번역으로 그리스·로마(Greco-Roman), 앵글로·색슨(Anglo-Saxon)처럼 별개의 두 집단을 병칭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저자는 원전의 용례를 분석하여 이를 병칭보다는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몽골제국인’으로 새기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당시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유라시아 전역의 유목민들을 묶어주는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예컨데 포스트 몽골 시대 킵차크초원의 튀르크어 사용 유목집단에서 튀르크가 집단명으로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트란스옥시아나 등에 거주하는 유목집단이 유목민을 전부 싸잡아서 투르크라 부르던 이슬람 세계 문인들의 영향을 받아 이란어 사용 정주민을 가리키는 ‘타직’과 대비하여 유목민이란 의미로 ‘투르크’라는 개념을 사용했던 정도이다. 하여, 여기서 사용된 ‘투르크’는 몽골계를 제외한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칭기스의 후손으로 히바칸국을 다스렸던 아불가지 바하두르 칸(Abu ‘l-Ghāzī Bahādur Khān)은 자신이 저술한 몽골제국사의 제목을 《투르크인의 계보》(Shajara-yi Turk)라 지은 것이다. 이같은 시각은 테무르조, 크림칸국, 우즈벡계 국가들 등에서 편찬된 사료들 모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문 37-40쪽과 42-43쪽, 231-32쪽, 234-35쪽, 244쪽 등)
이 같은 면모가 잘 드러나는 또 다른 서술이 바로 오이라트연맹과 북원 사이의 관계이다. 대체로 현대의 연구자들은 오이라트에 대해 ‘서몽골’이라 부른다. 이 경우 그에 대비되는 ‘동몽골’은 바로 북원이다. 그러나 저자는 다시 한번 이같은 통념에 한방을 날린다. 《몽골비사》나 《집사》는 오이라트가 몽골과 다른 기원을 가진 유목집단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17세기 몽골의 역사서 《알탄톱치》(Altan tobči: 황금사)나 《에르데니인 톱치》(Erdeni-yin tobči: 일명 ‘몽골원류’)에서도 마찬가지로 오이라트를 몽골로 보지 않고 몽골인의 전설적 선조인 알란 고아의 후예로 보지도 않는다. 《보감寶鑑》(Erdeni tunumal neretü sudur: 일명 ‘알탄칸전’) 역시 마찬가지로 몽골과 오이라트를 구분하여 서술한다. 이들은 오이라트를 ‘외적’(qari daisun)으로 보았다. 오이라트계 집단 역시 마찬가지로 몽골과 동족이라는 의식은 지니지 않았다. 갈단 체링(Galdan Čering)은 북원의 할하부락에 반청동맹을 제의하면서도 동류의식이 아니라 ‘종교’를 명목으로 걸었다. (본문 264-67쪽) 반면 북원인들은 조치울루스에서 분화된 칭기스조 국가들에 대해서는 동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에르데니인 톱치》에는 “조치의 피를 이은 토그마그(Toγmaγ) 칸들은 우리의 동족(töröl)이다”는 서술이 있다 (이 사례는 책이 아니라 이주엽, 2016: § 30에서 인용). 《보감》의 기록자 역시 투메트부의 알탄 칸(Altan Khan)과 모굴칸국의 압둘카림 칸(ʿAbd al-Karīm Khan)이 서로 동족 의식을 지녔음을 알려준다. (본문 103쪽)
이 책이 가진 또 다른 장점은 세심함이다. 이전에 세계사에서 몽골제국의 중요성을 강조한 책으로는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의 《세계사의 탄생》(황금가지, 2002)가 있다. 이 경우 청나라, 러시아, 오스만, 세 제국을 몽골 후계 국가란 틀로 분석했다 (197-210쪽). 물론 세 제국이 모두 몽골제국의 영향을 다대하게 받았다는 점에서 이같은 분류가 전혀 일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주엽 선생님 역시 본문 197쪽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저자는 직접적으로 몽골 계승성을 표출한 중앙유라시아의 칭기스조 국가들이나 테무르조는 몽골계승국가로, 대청, 모스크바국가, 오스만국가는 유라시아 (육상)제국으로 구분하고 있다. (20쪽)
물론 아쉬운 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선 구성면에서 가장 큰 아쉬움은 이란 지역에 대한 서술이 하나의 장으로 독립하지 못한 점이다. 저자는 27-28쪽과 118-21쪽 그리고 281쪽에서 몽골제국기에 ‘이란’ 정체성이 재창조되었음을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사파비종단의 성립에서 몽골인들이 수행했던 역할, 카자르조의 칭기스조 자칭 등 이란에서도 몽골제국의 권위가 중요했고 후계의식이 존재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은 하나의 독립된 장이 아니라 상자글로 제시되고 있는데, 그 중요성을 생각하면 조금 더 분량을 할당하여 하나의 장으로 제시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또, 각주를 모두 후주로 밀어넣었던 점도 아쉽다. 일부 주석은 단순 출처 제시가 아니라 중요한 설명을 담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내용상에서도 아쉬운 점이 있다. 저자는 무굴제국의 몰락이 시작된 계기로 아우랑제브의 비포용적 종교 정책을 들었다. 이로 인해 제국 전역이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었고, 이 틈을 타서 유럽 세력이 인도를 공략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우랑제브의 정책 변화는 사실 선대 황제들의 정책 변화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이같은 조치가 제국의 약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은 최근 힘을 잃고 있다. 마라타 전쟁, 라지푸트 반란, 시크교 전쟁은 각기 다른 이유로 발생했고, 일반적인 힌두교의 반발을 반영한 것도 아니었다. 아우랑제브 재위 무굴 통치계층의 종족 구성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도 이를 방증한다. (이에 대해서는 Streusand, 2011: 251-53 참고)
이러쿵 저러쿵 아쉬움에 대해서 늘어놓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이 포스트몽골시대 중앙유라시아사 연구의 고전이 되리라 생각한다. 지금껏 한국에 나온 중앙유라시아사 서적 가운데 포스트몽골시대를 이만큼 상세하게 다룬 학술서는 르네 그루쎄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김호동·유원수·정재훈 옮김, 사계절, 1998)이 유일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은 원서가 100년 가까이 전에 나왔던 점, 그나마 르네 그루쎄가 당시 중앙유라시아사 연구를 선도하던 학자들의 견해를 오롯이 반영하지 못했던 점 등 아쉬움이 있었다. 반면 이주엽 선생님은 20여년에 걸쳐 몽골제국의 유산이라는 광범위한 주제를 철저히 1차 사료에 기반해 연구를 수행하며 지식을 축적해왔다. 이 책은 그 연구들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책을 읽다보면 자연히 근대 초기 유라시아사의 전개에서 몽골제국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지 납득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오카다 히데히로의 말처럼, “아시아와 동유럽에서 몽골제국은 서유럽에서의 로마제국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岡田英弘, 1999: 270; 저자 역시 서장 29쪽에서 이 문장을 인용하며 책을 시작했다) 앞으로 14~18세기 중앙유라시아사를 인식하고 규정하는데 《몽골제국의 후예들》은 새로운 출발점으로 기능하리라 기대한다.
이주엽, Qazaqlïq, or Ambitious Brigandage, and the Formation of the Qazaqs
Dale, The Muslim Empires of the Ottomans, Safavids, and Mughals
Streusand, Islamic Gunpowder Empires
* 저자인 이주엽 선생님께서 직접 책을 선물해 주셨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책은 5월 4일 수령하여 6일에 일독하였다. 6월 11일부터 18일까지 기록하였다.
* 현재까지 확인한 Oxford Reseach Encyclopedias, Asian History에 참여한 한국인(/한국계?) 학자는 총 세 분이다. 이주엽 선생님의 기고문은 본문에서 언급하였다. 다른 한분은 최근 훈-흉노 연구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김현진(Hyun Jin Kim)이란 분으로, “The Xiongnu” 항목을 작성하셨다. 마지막 한분은 김광민이란 분으로, “Xinjiang Under the Qing” 항목을 작성하셨다.
참고문헌
이주엽 (2016). “Were the historical Oirats “Western Mongols”? Anexamination of their uniqueness in relation to the Mongols.” Études mongoles et sibériennes, centrasiatiques et tibétaines, 47: http://emscat.revues.org/2820
岡田英弘 오카다 히데히로 (2002). 《세계사의 탄생》. 이진복 옮김. 황금가지.
岡田英弘 (1999). “China as a Successor State to the Mongol Empire,” in Reuven Amitai-Preiss and David O. Morgan, eds., The Mongol Empire & its Legacy. Brill: 260-72.
Streusand, Douglas E. (2011). Islamic Gunpowder Empires: Ottomans, Safavids, and Mughals. Westview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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