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71 오스만어, 오스만 튀르크어 그리고 터키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터키 독립 이후 세속화(서구화)의 일환으로 언어개혁을 추진했고, 그 결과 현대 터키 튀르크어(Türkiye Türkçesi; 이하 터키 튀르크어)와 오스만 튀르크어는 문자부터 문법까지 모든 면이 크게 달라졌다고 한다. 사실과 다르다. 우선, 오스만어(Osmanlıca)와 오스만 시대의 튀르크어(Osmanlı Türkçesi; 이하 오스만 튀르크어)는 크게 다른 언어였다. 또한 언어개혁이라고 크게 하나로 부를 수 있지만, 실제로 아타튀르크의 개혁에서 언어개혁과 문자개혁은 별개로 이루어졌다. 오스만인들이 오스만어라 부른 언어는 튀르크어, 아랍어 그리고 페르시아어의 혼합이었다. 이 언어는 행정과 문학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고, 아마 일반 민중은 관공서에서나 접할 수 있었으나 거의 이.. 2019. 6. 25. 바그다드의 몰락 : Ⅰ. 들어가며 1258년, 몽골군은 바그다드 성벽에 도달했다. 짧은 포위전이 뒤따랐고, 그들은 “날아가는 비둘기를 공격하는 굶주린 매처럼, 양을 공격하는 사나운 늑대처럼” 도시를 휩쓸었다. “13세기 몽골인들이 바그다드의 도서관들을 태워버리지 않았더라면, 우리 아랍인들은 더욱 과학을 발전시켜 훨씬 예전에 원자폭탄을 개발했을 것이다. 바그다드 약탈은 우리를 몇세기 이전으로 퇴보시켰다.” - 시리아 고위 공직자의 말 (Hottinger, 1957) 이 사건은 단순히 바그다드라는 한 도시의 함락이나 압바시야 칼리프 국가의 붕괴 정도가 아니라 이슬람 문명의 몰락을 야기한 사건으로 이해되어왔다. 이와 같은 시각은 2003년 미국이 바그다드를 점령한 뒤에 더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바그다드 함락은 무슬림에게 있어 이슬람 또는 이.. 2019. 6. 23. 오스만 제국의 즉위 의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군주의 권력은 단순히 그들이 지휘하는 군대와 관료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권력은 왕조와 그 신민들, 그리고 기타 유력자들 사이에서 있었던 중앙과 지방 모두에서 끊임없이 벌어진 협상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군주들은 스스로의 존재를 신민들에게 일상적으로 상기시키려고 조심스럽고도 지속적으로 노력해야만 했다. 오스만 파디샤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스만 군주들은 그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다양한 정통성 확보의 도구를 사용했다. 왕조의 생애 주기의 각 단계를 공식적으로 축하하는 것은 물론이요, 자선을 그 자신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사용했다. 이 글에서는 왕조의 생애 주기를 공식적으로 축하하는 행사들 가운데 그 군주 자신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법한 .. 2019. 6. 16. 이란에 존재한 거란 왕국 쿠틀룩칸국Qutlughkhāniya/Ḳutlugh-Khānids 또는 케르만의 거란 왕국Qarā Khiṭāy of Kerman은 1222년부터 1306년까지 키르만 지역을 통치했고, 그 왕족은 야율 씨의 일원이었다. 쿠틀룩칸국은 호라즘샤 왕국, 몽골 제국의 대칸 나중에는 일칸국의 봉신이었다. 인근의 야즈드 아타베그 왕국이나 파르스의 살구르조, 무자파르조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때로는 칼리프나 인도와도 관계를 맺었다. 쿠틀룩 칸이라는 이름은 이 왕국의 태조, 바라크가 화레즘샤와 압바스 칼리프에게서 각각 쿠틀룩 칸, 쿠틀룩 술탄으로 임명되었던데서 기원했다. (Minorsky, 1986: 553) 역사 쿠틀룩 칸 바라크 하집의 치세 왕국의 태조는 나스르 알둔야 왈딘 아불파와리스 쿠틀룩 술탄 바라크 하집 .. 2019. 5. 28. 칭기스조 제자 울루스 부족 구성 몽골 제국이 이전의 유목 제국들과 다른 점 가운데 하나는 탁월한 동화력이라 생각한다. 탕구트(서하), 키타이(거란), 알란, 킵차크 등 본래 몽골과 구분되던 다양한 기원을 지녔던 종족들은, 몽골 제국 이후 칭기스조의 지배를 받는 부족들로 변화했다. 《원사元史》에 소개된 칭기스 칸의 발언에도 이와 같은 특징이 잘 드러난다. 거란의 수령이던 야율류가(耶律留哥)가 죽었을때 그의 미망인(후처[後妻])이 칭기스 칸을 찾아가 칭기스칸을 시위(侍衛)해오던 전처(前妻) 소생의 설도(薛闍)로 하여금 아버지의 자리를 잇게 하고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대신 시위의 일을 맡도록 해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칭기스 칸은 “설도는 이미 몽골인이 되었다. 그는 짐을 따라 서역에 원정하였다”라고 하면서 후처의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직책.. 2019. 5. 24. 서하 멸망 후 탕구트 사람들 서하가 멸망할 때 칭기스 칸의 유언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학살당한 것은 분명하나, 종족이 절멸된 것은 아니였습니다. 많은 탕구트 사람들은 살아남아 대원제국을 위해 일했죠. 그들의 지위 역시 나쁘지 않았는데, 그들은 주르첸이나 키타이 사람들보다 우대받았습니다. 중국 중부에는 탕구트 사람들이 모여사는 작은 규모의 마을들도 여럿 있었는데, 그들은 명말까지 그곳에서 자신들의 문자를 사용하며 살았다고 하네요. 1343년 승려 덕성(德成)이 몽골고원으로 향하는 도로에 있는 거용관(居庸關)에 과가탑(過街塔)을 세웠습니다. 그는 그곳에 《다라니경(陀羅尼經)》의 구절들 중 여행자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문구를 뽑아 위구르, 파스파, 한문, 산스크리트, 티베트, 서하 문자로 세겼죠. 이를 볼때 대도를 오가는 탕구트 사람이 적.. 2019. 5. 24. 오스만 제국의 로마 계승성 관련 연구들 Fodor, Pál (2015). “Byzantine Legacies in Ottoman Identity.” in Barbara Kellner-Heinkele and Simone-Christiane Raschmann (eds.). Opuscula György Hazai Dicata: Beiträge zum Deutsch-Ungarischen Workshop aus Anlass des 80. Geburtstages von György Hazai. Klaus Schwarz Verlag: 93-108. 오스만 제국의 로마 계승성에 대한 연구사와 현재의 중론에 대해 정리한 에세이다. 연구사적 부분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로마 계승성에 대한 연구가 역사가 깊으며, 최근에 더 많은 주목을 받고 있음을 보였다. 현재 .. 2019. 5. 12. 무라드 2세의 군사교리 개혁 무라드 2세의 업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바르나 전투 등의 승리를 통해 위기를 넘긴 것, 앙카라 전투 이후 오스만 국가의 확장 정책을 다시 추진하기 시작한 것, 메헴메드 2세를 후계자로 둔 것 등. 그러나 나는 그보다 재위 만년에 보여준 군사교리 개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444년의 바르나 전투와 1448년 제2차 코소보 전투 사이의 기간에 무라드는 향후 오스만 제국의 고전기를 지탱할 중요한 개혁을 실시했다. 15세기 초반 오스만 군대는 전형적인 튀르크·몽골식 군대였다. 당시 오스만이 동원할 수 있는 총 군대는 약 64,000명이었다. 약 30,000명이 시파히 지방군이었고, 카프쿨루 상비군이 약 10,000명, 아잡 등 징집병이 약 24,000명이었다. 즉, 기병대의 비율.. 2019. 5. 5. 6투멘의 기원 북원 대칸 직속의 부족部族은 백여 년의 이합집산을 거쳐,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6대 집단을 형성했다. 특히 오이라트 에센의 멸망에서 만돌론이 칸위에 오르는 20여 년 간이 6대 집단 형성에 중요한 시기였다. 만돌론의 시대에 6대 부락은 이미 그 규모를 갖추었으며, 다얀 카안이 만돌론의 사업을 계승하여 6대 부락을 아들들에게 분봉함으로써 제 부락을 자신의 가족 통치 하에 두었다. 이를 6투멘Jirγuγan tümen이라 한다. 본래 투멘tümen이란 만호(萬戶)란 의미로, 1만 명의 병력을 공출할 수 있는 집단을 가르켰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부족을 통합한 단위로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투멘은 부락(部落)으로도 새겨진다. 각 투멘은 여러 오톡(otogh)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개 다얀칸의 6만.. 2019. 5. 2. 이전 1 ··· 3 4 5 6 7 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