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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71

샤흐 세밴 보통 샤흐세반[Shahsevan; 아제리어: 샤흐세밴(Şahsevən), 터키어: 샤흐세벤(Şahseven)]이라 불리는 샤흐 세밴(shāhï sēvän)은 아제르바이잔 동부의 무간과 아르다빌, 그리고 이란 서북면의 잔잔과 카즈빈 사이 카라칸과 캄사에서 유목하는 부족집단을 가리키는 통칭이다. 이들은 16세기와 18세기를 거치며 차츰 유목부족 연맹체를 이루었다. 20세기 말 샤흐 세밴인들은 5,000에서 6,000가구, 즉 40,000명 정도가 남았고, 대부분 유목 또는 반유목적 삶의 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샤흐 세밴 엘(el: 부족 연맹체)은 느슨하게 조직된 40개 타이파(ṭāyfā: 부족)로 이루어졌고, 각 타이파는 50개에서 수백개의 가구를 포함했다. 문화나 정체성의 측면에서는 오구즈계에 속하지만, .. 2019. 9. 5.
오스만, 그는 어디에서 왔나 오스만 제국사의 대가 가운데 한 사람인 콜린 임버는 한 논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오스만 가문의 근원에 대한 그 어떤 이론도,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오스만 가지에 대한 전통적인 이야기(tale) 대부분은 창작일 것이다. 현대 역사학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초창기 오스만사가 블랙홀임을 인정하는 것 뿐이다. 이 구멍을 막기 위한 모든 시도는 단지 우화를 하나 더 만드는 일일 뿐이다.”(Imber, 1993: 75) 오스만 가문의 시조로 알려진 오스만 1세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조차 모른다. ‘그’의 시대에 존재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유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발행인 오스만 이븐 에르토그룰’(ʿOthmān b. Erto.. 2019. 8. 16.
인도의 황제가 된 거란인들 Ⅰ 일투트미쉬 아불무자파르 샴스 알둔야 왈딘 일투트미쉬 이븐 엘람 칸(Abuʾl-Muẓaffar Shams al-Dunyā wa-l-Dīn Iltutmish b. Ēlam Khān: 엘람 칸의 아들, 승리의 아버지, 세계와 이슬람의 빛, 나라를 움켜진 자[國主])은 인도의 노예 왕조에서 가장 위대한 이로 꼽힌다. 일투트미쉬는 노예 왕조의 군주로써는 3번째이며, 델리 술탄국의 실질적인 창건자이다. “아이베그의 활동은 인도에서 독립적인 무슬림 국가의 출현을 의미했고, 델리 술탄국을 세운 이는 일투트미쉬였다. (Jackson)” 샴스 왕통Shamsiyya의 통치자로써는 첫번째였다. 일투트미쉬의 왕통은 총 6명의 델리 군주를 배출했다. 일투트미쉬의 출신에 대해서는 킵차크계 욀베를리Ölberli 부족 출신이라는 기록과, 카라키.. 2019. 8. 2.
알리 케말, 보리스 존슨의 터키인 증조부 최근 보리스 존슨이 새로이 영국 총리로 취임했다. 이는 터키에서도 소소한 화제가 되고 있는데, 터키계 혈통 때문이다. 존슨 총리의 증조부는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내무장관을 지낸 알리 케말이다. 알리 케말은 언론인으로 경력을 시작해 입각하여 위태로운 조국의 조타수로 나선 그의 경력이 보리스 존슨과 겹치기 때문인지 보리스 존슨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두 사람의 경력을 겹쳐보는 것 같다. 어쨋든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알리 케말의 삶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알리 케말(ʿAlī Kemāl, 현대 터키어로는 Ali Kemal; 1867년 ~ 1922년)은 오스만 제국의 언론인, 작가 그리고 정치인이다. 알리 케말의 아버지, 하지 아흐메드 에펜디(Ḥājjī Aḥmed Efendi)는 아나톨리아 중부의 .. 2019. 7. 25.
몽원 제국과 북중국의 몰락 들어가며 초기 몽골 제국의 정복에 대해서는 ‘초원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시각이 많다. 특히 북중국의 쇠퇴에 대한 서술은 더더욱 그렇다. 요수[姚燧]의 《목암집》[牧庵集]에 따르면, “금의 정우 연간(1213년 ~ 1216년)부터 하삭[河朔] 지방은 20년 동안 교전 상태가 지속되었고, 주민 10 중 7은 도망자였다.” (愛宕松南 , 2013: 86에서 재인용) 이런 상은 몽골이 북중국을 가축을 기를 수 있는 평원으로 바꿀 계획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인해 더욱 강화된다. 야율초재 열전에 따르면, 칭기스 칸[太祖]의 치세 중에는 서역 정벌에 몰두해서 중원을 다스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한지[漢地]의 관리는 거의 모두 민으로부터 취렴하여 사복을 채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결과, 그들의 재산은 엄청난 숫자를 .. 2019. 7. 24.
바그다드의 몰락 : 完. 마치며 훌레구의 이라크 정복은 종래의 이미지와 달리 경제에 직접적으로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이라크의 농업 생산성은 이슬람 정복 직후부터 완만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원인은 전쟁, 내전, 기후 변화, 정치 구조 변화 등 다양한 요인들이 혼합된 것이었다. 특히 기후 건조화로 이란 방면에 유목정권이 들어선 것이 치명적이었다. 셀주크 시대 이후 옛 아랍의 심장부는 더 이상 이슬람 세계와 정치의 중심지가 아니였다 (Morgan and Reid, 2011: 13-16). 바그다드의 정치적 지위가 격하되자 바그다드를 거쳐 지중해로 가는 주요 관문이었던 바스라 역시 중요성을 잃어갔다. 이전에 바스라로 모이던 물류는 홍해, 타브리즈 등으로 나누어졌다. 13세기 후반에 발생한 몽골의 페르시아와 이라크 정복은 이미 진행되.. 2019. 7. 23.
바그다드의 몰락 : Ⅳ. 교역로의 변화 8세기 인도양과 유럽 사이 교역은 압바시야 국가와 당 제국의 번영과 부에 기반하고 있었다. 양 제국은 모두 외국산 사치재에 대한 어마어마한 수요를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 인도양을 통한 교역로의 동쪽 끝은 중국의 광저우였고, 서쪽 끝은 바그다드의 항구도시인 바스라였다. (Pearson, 2011: 322) 12세기부터 16세기까지 무슬림들은 인도양의 상업을 지배하며 해양교역에서 많은 이익을 얻었다. 그들은 특히 지중해와 인도양 사이에서 홍해와 페르시아 만을 이용하여 교역했다. 8세기에 이미 아랍과 페르시아인 무슬림들은 중국의 광저우廣州(영어식으로는 Canton)에 거주하며 커뮤니티를 형성했으며, 758년에는 잠시 반란을 일으켜 도시를 지배하기까지 했었다. (Morgan and Reid, 2011: 8-1.. 2019. 7. 23.
바그다드의 몰락 : Ⅲ. 농업의 쇠퇴 이라크는 바그다드가 건설되기 이전부터 칼리파 제국의 핵심이었다. 압바스 국가(즉, 고대 후기부터 중세까지 아랍 제국)의 힘은 사와드 지대가 제공한 막대한 부에 기반한 것이었다. 사와드 즉, 흑토黑土 지대는 바그다드 남쪽에서 바다까지 뻗은 광활한 경작지를 가리키는 말인데,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 강과 그 지류들, 그리고 운하에 의해 물을 공급받았다. 바로 이 경작지에서 수확되던 농산물에서 부가 창출되었고, 풍족한 생산량은 세심한 농경과 온화한 기후에 의지한 바였다. 이 같은 번영의 핵심에는 관개시설이 있었다. 이 정교한 수로시설은 지속적인 관리가 반드시 뒤따라야했다. 운하 내부에 토사가 너무 많이 쌓일 경우에는, 아예 새로운 운하를 만들어야 했다. 수로 인근 저수지의 물이 증발되도록 내버려둔다면, 토지 .. 2019. 7. 23.
바그다드의 몰락 : Ⅱ. 몽골 제국의 바그다드 정복 1255년, 칭기스 칸의 손자 훌레구는 대칸 뭉케에게서 서아시아 정벌을 명받아 몽골고원을 떠났다. 그의 군대는 1257년 몽골 제국의 이란 통치 중심지인 하마단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바그다드의 압바스조에 서신을 보내 항복을 제의했다. 이에 칼리프 알무타심은 압바시야 국가가 심판의 날까지 영원할 것이며, 만약 몽골군이 이를 공격한다면 동과 서의 무슬림 전체가 들고 일어서 자신들을 보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훌레구는 후라산으로 퇴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 조롱했다. 이에 훌레구는 공격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는 몽골의 전통에 따라 군대를 셋으로 나누었다. 좌익은 루리스탄을 경유해 후지스탄을 공략하게끔하고, 우익은 이르빌을 거쳐 아제르바이잔을 공략하게끔 명령했다. 그리고 스스로는 중군을 이끌고 바그.. 2019. 7.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