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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민군관계 Ⅳ 군부 개입의 시대 지상군 사령관 제말 귀르셀(Cemal Gürsel)은 소수의 장교들을 끌어들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1960년 5월 27일 새벽에 쿠데타를 일으킨 군대는 멘데레스 등 정치인들을 체포하고 이스탄불과 앙카라를 장악하였다. 이후 귀르셀과 40세 이하인 37명의 장교들은 국가단합위원회(Millî Birlik Komitesi)를 구성해 권력을 장악했다. 1961년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반대표가 38%나 나온데 놀란 이들은 멘데레스와 2명의 각료를 서둘러 처형해버렸다. (Robinson, 1998: 199-202) 그러나 폭력적인 쿠데타 과정과 별개로, 새로 도입된 1961년 헌법은 제1공화국 헌법보다 더 자유주의적이었다. 쿠데타 발생 직후 이스탄불대학교 출신 법률가들이 주가 된 위원회가 신헌법 초안을 발표.. 2020. 1. 29.
터키의 민군관계 Ⅲ 케말주의 공화국 제1공화국 시기에 군부의 역할은 여러모로 ‘후견인’이라 할만했다. 즉, 군부는 터키 공화국의 세속화와 근대화 개혁을 ‘후견’한 것이다. 이 시기 군부의 정치 개입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민군관계는 1950년대 이후 더 복잡해졌다. 터키가 차츰 의회제 민주주의를 채택하며 다당제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윌리엄 헤일(William M. Hale)은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터키 정치에서 군부의 역할을 3시기로 나누어 조망했다. 첫번째 시기인 1923년부터 1926년까지(즉, 아타튀르크 시대), 아타튀르크는 가능한 한 자신의 권력에 위험이 되는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즉, 군 장교들은 이 시기 철저히 아타튀르크의 개인적인 권력을 위해 일했다. 그 다음 시기는 1926년부터 1950년까지(즉, 케말주.. 2020. 1. 22.
터키의 민군관계 Ⅱ 골츠와 연합진보회 터키의 민군관계를 역사적으로 개괄하기 위해서는 오스만 시기부터 검토해야 한다. 현대 터키의 정치와 사회에서 군부의 역할은 오스만 제국의 국가/사회 관계 구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오스만 사회는 두가지 계급으로 나누어졌다. 지배계층은 ‘군인(askeri)’라 불리었고, 피지배계층은 ‘가축(reaya)’라 불리었다. 즉, 오스만 제국을 통치계층은 군인, 관료, 종교인 등 직업에 관계 없이 군인이라 불리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는 군대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 말까지 서구화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군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군부는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정치 개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오스만 정치 구조의 서구화는 독립 전쟁 이후 공화국의 성립까지 이어졌다... 2020. 1. 13.
터키의 민군관계 Ⅰ 들어가며 터키에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터키 군대(Türk Silahlı Kuvvetleri, TSK)의 정치 개입이었다. 1940년대 터키가 다당제로 전환한 이래 터키군은 1960년, 1971년 그리고 1980년에 정치에 개입하여 민주화 과정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1997년에는 정부의 사임을 강요했다. 이들은 결국 문민정부의 권위를 제약했다. 뿐만 아니라 수 차례의 쿠데타 계획과 시도가 있었으나, 다행히 군부의 거두들의 경고로 유산되었다. 터키는 여전히 민주화의 여정에 있다. 즉, 아직 민주주의와 헌정질서가 자리잡지 못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민군관계를 중심으로 여전히 진행중인 민주화의 과정을 개괄하고, 그 모순과 딜레마를 지적하겠다. 첫 번째 단락은 군부의 계도와 민군 합작라는 기묘한 .. 2020. 1. 6.
티무르 르네상스 ‘르네상스’(Renaissance)란 문화적으로 과거를 창조적으로 재발견하고 적극 활용하는 문화 부흥 운동을 의미한다. 15세기와 16세기 유럽을 중심으로 한 르네상스가 가장 유명하다. 그러나 유일한 것은 아닌데, 일부 학자는 중동, 특히 페르시아 세계에서도 르네상스가 존재했음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페르시아 세계에서는 르네상스가 두 차례 존재했는데, 바로 부야조 르네상스와 티무르조 르네상스가 그것이다. 나는 이 글을 전에 미르 알리 시르 나바이에 대해 적으며 언급한 티무르조 르네상스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적었지만, 배경지식을 위해 부야조의 르네상스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 뒤에 티무르조 르네상스를 다루겠다. (Darling, 2006: 55-56) 부야조[Būyids. 페르시아어로는 알레 부야(Āl-e .. 2019. 12. 30.
알리 시르 나바이와 티무르조 르네상스 15세기 중반 이슬람 세계 동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궁정은 티무르조의 군주, 술탄 후세인 이븐 만수르 이븐 바이카라(Sulṭān Ḥusayn b. Manṣūr b. Bāyqarā), 일명 후세인 바이카라의 것이었다.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는 1469년부터 1506년까지 헤라트를 통치했는데, 이 시기 헤라트의 영화는 당대 사료에서 여러차례 강조된다. 다울라트샤 사마르칸디[Dawlatshāh Samarqandī, 《타드키라트 알슈아라》(Tadhkirat al-shuʿarā: 시인들의 전기)의 저자. 이 책은 150여 시인의 시와 삶을 다룬다]는 후세인 바이카라 재위를 예술가에 대한 후원과 예술의 발전으로 특징지었다. 후세인 바이카라가 죽은 직후에 헤라트를 방문한 바부르(Bābur)는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의 시.. 2019. 12. 21.
차르 권력의 기원, 포메스티예 베르나드스키는 모스크바 차르 권력의 중요한 원천 가운데 하나로 군사 봉토 체제를 들었다. 이 군사적 봉토의 이름은 바로 포메스티예(Поместье, Pomest’e; ‘뽀메스찌예’라고도 표기됨)였다. 포메스티예는 군사적 봉직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토지를 뜻한다. 이를 받은 봉직자, 즉 포메시키(Помещики, Pomeshchiki)는 그 대가로 국가의 소집에 규정된 장비를 갖추고 정해진 장소에서 등록을 한 후에 전투에 참여할 의무가 있었다. 토지 150 데샤티나(미터법 이전의 러시아 면적 단위로, 1 데샤티나는 10,925㎡에 해당했다. 즉, 150 데샤티나는 대략 1,635,000㎡) 당 병사 1명과 장비를 갖추어야 했다. 만약 봉직자가 등록을 하지 않거나 전투에서 지휘관에게 불복종한다면 포메스티예.. 2019. 12. 20.
동덕여대 유라시아 투르크 연구소 제13차 정기 콜로키움 2019년 12월 18일 수요일에 동덕여자대학교 유라시아 투르크 연구소에서 주최한 제13차 정기 콜로키움에 다녀왔다. 유라시아 투르크 연구소는 2016년 2월에 설립된 신생 단체이지만, 이름에서 어떤 목표를 지니고 있는지 곧바로 알 수 있을 것같다. 유라시아 투르크 연구소의 정기 콜로키움은 매월 1회 개최된다. 공개 세미나이기 때문에 참가에 제한은 없다. 연구소 이메일이나 진행하는 조교분에게 미리 문의 한번 드리면 되는 것 같다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 이번 세미나는 2개의 세션으로 진행되었다. 첫번째 세션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의 강덕수 교수님이 진행하신 “사하의 민족과 언어·문화”였다. 러시아 연방의 사하 공화국의 개략적인 소개부터 시작해서, 야쿠트와 에벤티 등의 역사를 간략히 다룬 .. 2019. 12. 19.
산지브 산얄,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 산지브 산얄 (2019).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 류형식 옮김. 소와당. 406쪽. 25,000원. Sanyal, Sanjeev (2016). The Ocean of Churn: How the Indian Ocean Shaped Human History. Penguin Random House India. 비전문가가 적은 역사 관련 도서는 정말 오래간만에 읽는 것 같다. 인도(양) 관련 역사책도 거의 읽지 않았다 (퍼시벌 스피어의 《인도 근대사》 정도만 있나 싶다). 적고 보니 편식이 되게 심하구나 싶네. 비전문가가 적은 책이라고 하지만, 깊이가 그리 얕지는 않다. 특히 선사시대쪽 각주들을 보면 저자가 꽤 다양한 책이나 논문을 많이 공부했구나 싶다. 금융 시장에서 오래 활동한 산지브 산얄의 경력 덕분인.. 2019. 12. 15.